[연애에 대해서]
정리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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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6 00:00
연구소 홈페이지에 게재된 사항을 제목별로 정리하여 우리 교회가 당면된 사항에 대해서 미리 지식하고 살펴 바른 정관을 가질수 있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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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연애가 잘못된 것이며 그 위험성은 적지 않습니다.
마음의 죄도 성경은 육체의 죄와 같이 봅니다. 연애가 중매보다 이 면에 있어 더 위험하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티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중매결혼을 말하는 것은 중매결혼이 옳아서가 아니고 연애가 더 위험하기 때문일 뿐입니다. 성도의 사랑이란 대속의 사랑만을 사랑이라고 하지 이성적 사랑은 성경이 말하는 성도의 사랑이 아닙니다. 동명이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2.주변에 연애하여 결혼한 사람 중에 잘 사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연애를 통해 이성범죄를 겪은 사람에게는 그 상당한 보응이 반드시 동반됩니다. 남보기에 대단히 부럽게 잘 사는 연애 출신 결혼 교인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만 아는 댓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죽는 것과 먹지 않고 에덴동산에 사는 것은 아주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먹고도 안죽는 일은 없듯이 이성사랑인 연애로 결혼한 사람은 반드시 그 댓가를 감당하기 어렵도록 치르게 된다는 점을 우선 확인하셨으면 합니다.
3.이성적 사랑을 즐기는 면에서도 중매결혼은 연애결혼에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장점이 많습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있는 모든 욕심은 첫 술이 가장 강하며 그 욕심이 반복이 될 때는 쉽게 무뎌져 버립니다. 식욕과 같이 정욕도 그러하며 이런 점에서 연애하는 이들은 잠깐 즐긴 후 그다음에는 무뎌져 버린 욕심에 공허감을 느끼게 됩니다. 다시 즐기려면 상대를 바꾸거나 그 방법을 변태로 바꾸어 끊임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결혼 전 이성의 욕심을 절제한 사람은 그 당시만을 보면 '사랑의 억압'이라는 표현도 듣게 되지만 오랜 세월을 두고 계속되는 이성의 재미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아껴먹는 과자 맛과 한꺼번에 포식한 케이크 맛을 비교하면 알 것입니다.
4.야곱의 연애는 장차 회개해야 할 땅에 속한 생활이었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혼시킨 것이 모범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연애하는 까닭에 칠년을 수일 같이 여겼더라고 했습니다. 야곱의 이 시절은 훗날 얍복강에서 완전히 회개하고 돌아서야 했던 세상생활이었습니다. 야곱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여 야곱의 회개해야 했던 생활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가장 표준적인 결혼은 이삭이 결혼을 하게 되는 과정을 기록해 주신 창세기 24장이며 그 반대의 경우가 바로 창세기 29장의 야곱의 결혼 내용입니다.
우리는 성경이면 성경대로 끝내버리지 성경은 비록 그렇게 가르쳐도 현실이 너무 그렇지 않다고 하여 현실에다 성경을 편집하지는 않겠다는 신앙노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넓은 면에서 또 여러 면에서 냉정하게 보시기를 권합니다.
5.참고할 자료로는
이곳 홈페이지 문답방의 '180번: 결혼과 이성문제'와 '연경교재'방의 '주제연구'의 '성경적이성관'이라는 연경교재에서 이 문제를 여러 면으로 다루어보았습니다. 성경적이성관은 1991년에 만들어졌으나 현재 이곳에 자료로 올리지를 못했으며 이번 주간 안으로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양쪽 자료에 없는 부분을 다음 (전제답변)에서 보충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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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답변)
1.우선 연애와 중매를 이런 시각에서 보고 싶습니다.
첫눈에 들고 설레임 중에 시작했다가 결혼까지를 생각할 상대인지를 후에 계산하는 것이 연애의 일반적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을 전제로 결혼 조건에 맞을 상대인지를 계산한 다음 사랑이라는 감정이 더해질 수 있는 상황으로 가는 것이 중매라고 하고 싶습니다. '성(性)'이란 부부를 전제하여 주신 것이며 부부가 전제되지 않은 성은 간음이 된다는 것이 성경입니다.
2.그렇다면 우선 연애를 장난 삼아 가볍게 한다면 철없는 아이라고 비판하고 싶습니다.
결혼에 사용하고 가정을 이루라고 주신 것이 이성간의 사랑입니다. 결혼을 통해 여자는 출산을 하게 되고 남자는 결혼을 통해 만들어진 가족을 먹여 살리는 책임을 각각 지게 됩니다. 타락한 아담과 하와에게 회개의 길로 주신 것이 바로 결혼을 통한 가정의 의무였습니다. 이 결혼에 사용하도록 주신 '사랑'을 단순히 즐기기 위해서나 재미 삼아 노는데 사용했다면 도무지 정상인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이야 반지로 공기놀이를 해서 되겠으며, 수표를 가지고 딱지 따먹기를 해서야 되겠습니까? 불행하게도 현 시대는 깊은 생각없이 그냥 즐기고 그냥 장난삼아 이성친구를 가지는 부류가 가장 많으며 이 점이 가장 안타깝습니다.
3.그다음 연애를 진지하게 하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 결혼에 이르지 못하면 이미 이혼이 됩니다.
연애를 진지하게 한다면, 일단 책임감에 있어서는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하나 알아 둘 것은 '이성적인 면'에서만 본다면 두 사람은 이미 실질적 결혼관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 연애가 실제 결혼에 이르지 못하게 되고 중단된다면 실질적으로 이혼과 같은 죄가 추가 됩니다. 연애는 이미 '이성적인 면'에서는 결혼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를 다 갖춘 '준결혼' 또는 '실질적 결혼'입니다. 육체적 접촉이 어느 선까지 갔던지 간에 마음과 자세는 이미 결혼한 부부가 되어가고 있다고 볼 것입니다. 연애하는 사람끼리 육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관계에 이르렀느냐는 것은 하나의 결과일 뿐입니다. 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그들의 마음은 이미 결혼한 부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마음자세는 결혼을 해 버린 부부보다 더 강하게 되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모든 욕심들입니다. 욕심이란 그 첫 술이 가장 강한 것이며 반복이 되면 무뎌지기 때문입니다. 즉 결혼한 부부와 연애중인 사람들을 비교한다면 육체적 관계는 결혼한 사람이, 마음의 관계는 연애중인 사람이 더 강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고방식이 좀 자유로운 현대인이기 때문에 연애도 마음 편하게 했을 것이니 굳이 결혼식의 유무와 호적신고 유무로만 결혼관계를 인정할 것이 아니고 실제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주고 받는다면 이미 실질적인 결혼관계에 있다고 해야 보수적이지 않고 현대적인 양심을 가진 사람이 될 것입니다. 케케묵은 사람들과 같이 호적에 처녀라고 처녀를 고집할 것이 무엇 있겠습니까? 결혼식을 하고도 상당 기간 호적에 올리지 않은 부부도 적지 않습니다. 따라서 연애를 하다가 결혼에 이르지 못하면 연애했던 상대방 숫자만큼 자신은 이혼한 경력을 가졌다고 해야 할 것이고 이런 사실을 떳떳하게 공개를 할 수 있어야 자유분방한 현대인일 것입니다. 결혼의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주제인 '이성적 사랑'을 가졌던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케케묵은 호적상 신혼부부는 많아도 실질적으로는 신혼부부로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고, 거의 모든 결혼식은 사실상 재혼식, 삼혼식 사혼식 오혼식인 사람이 부지기 수일 것입니다.
연애가 나쁘다는 것은 결혼을 꼭 할 사이라면 결혼식을 해서 부부가 된 다음 실컷 이성적 사랑을 가져도 될 것인데 굳이 결혼을 뒤로 미루어두고 결혼 이전의 사랑, 즉 간음을 할 필요가 무엇이겠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연애란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너무도 많은데 이렇게 되면 결혼적 간음죄에다가 이혼죄까지 덩해가는 죄덩입니다.
4.연애가 바로 될 수 없는 이유는 연애의 본질에 있습니다.
제 눈에 좋아야 시작하는 것이 연애인데 제 눈에 좋게 보이면 모든 사리판단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감정이 지성에 앞서가면 인격적으로는 소경이 된 것입니다. 이후에 발생되는 일은 너무도 환한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 순간적으로는 저 사람 아니면 안된다고 별별 행동을 했다가 훗날에는 그냥 철없던 한번 해 봤던 일로 돌려버리지만 그 비용은 비교 못 할 만큼 큰 것입니다. 첫눈에 들고 설레임 중에 시작했다가 결혼까지를 생각할 상대인지를 후에 계산하는 것이 연애의 일반적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을 전제로 결혼 조건에 맞을 상대인지를 계산한 다음 사랑이라는 감정이 더해질 수 있는 상황으로 가는 것이 중매라고 하고 싶습니다. 인간이 하는 일에 탈 없는 것이 없지만 중매란 연애에 비해서는 현대인다운 경제논리 이익논리에 있어서도 유리한 면이 많을 것입니다. 이유가 있어 중매를 선호하는 것이며 그 결과가 욕심을 가질 만한 장점이 있기 때문에 중매를 선호하는 것일 뿐, 유교적 중매와 우리 신앙노선에서 권면하는 중매와는 그 본질이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