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인가, 정통인가? (출12:26-27)
나라마다 문화마다 전통이 있습니다. 예로부터 그렇게 해오던 것들, 주로 외적인 모습드을 말합니다. 처음에는 외적이 모습에 내면적인 원인이 있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내적인 의미는 사라지고 외형만 남게 되면 그것을 전통이라고 합니다. 조선 시대 기우제는 비가 내리기를 원하는 국가 행사였습니다. 미신적인 이유가 있었고, 비와 풍년에 대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그런 의미는 없고, 전통 행사로서 기우제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로마가 유대인들을 지배하기 위하여, 그들의 종교를 탄압할 때, 말씀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하고 성경 전체를 외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로마가 성경을 모두 불살라도, 이 사람들을 모두 죽이지 않으면, 성경은 계속 전승될 수 있도록, 자기 자체가 성경이 되어버린 철저한 신앙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리새인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예수님의 시대가 되니 그들의 철저한 신앙은 전통으로만 남았고, 주님께서는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천주교는 사도들의 신앙을 계승했고, 교부들의 신학을 전승했습니다. 처음에는 잘 믿어보려는 열망이 있었으나, 세월 속에 전통만 남았고 의미는 잊어버렸습니다. 정통의 계보에 있는 사람들은, 정통과 전통을 잘 구분하지 않는 듯합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으니” 그래서 의미는 모르고, 외형만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전통입니다. 좋은 전통은 그 의미까지 이해해서 가지고 있을 수 있으면 가장 좋겠습니다. 그러나 시대에 맞지 않는 전통이란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세상도 오늘날 진지한 마음으로 기우제를 하지는 않습니다.
교회 안에 전통을 정통인 것 처럼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바리새인이 되고 천주교가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회가 100년 찬송가를 가지고 있으니 “너무 전통적이다.”고 비판을 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공회가 사도신경을 예배 시간에 반복하지 않으니 “너무 진보적이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 찬송가를 고집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고, 고집만 하고 있다면 전통적이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유가 있어서 지금의 찬송가를 유지하고 그것을 후대에 계속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적어도 찬송가에 있어서 정통이 되고, 다른 사람들은 탈선입니다.
유월절 절기는 전통으로 “지키기만 해라”가 아니었습니다. 지키고, 너희 자녀들이 이것이 무엇이냐 묻거든, 이러고 저러고 설명을 해주어라. 신앙의 정통을 가르쳐 줄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 유대 종교의 행위들은 전부 전통이 되었고, 정통에서 벗어났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의 사도신경 반복은 전통인가 정통인가? 교인 하나를 붙들고 사도신경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면 바로 정답이 나올 듯합니다. 주기도문의 뜻을 알고 기도하는 것일까? 신앙이 어릴 때는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땅히 선생 될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2대 3대를 넘어가면, 우리는 종교 전통을 가질 수 있어도, 신앙 정통은 아니게 됩니다. 그것이 천주교의 타락이었습니다.
오늘날 유럽의 교회들은 전통만 남았습니다. 그러니 생명력이 없고, 전통의 추억을 기억하는 늙은 사람들만 앉아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도 정통에서 많이 벗어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정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조차, 전통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바른 전통은 지키는 것이 맞습니다. 전통의 의미를 알고 지켜가면 그것은 정통의 범위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통이 정통을 벗어나는 것이 되면, 과감히 바꿀 수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정통을 가야 합니다. 전통은 세상 종교가 가는 방향입니다. 우리 공회는 타교단에 비해 옛것을 많이 보존하고 있습니다. “연보”, “조사”라는 단어조차 타 교단에서는 사라진 말입니다. 그런데 왜 보존하고 있는가? 전통이 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알고 지키면 정통이 됩니다. 모르고 이어나가면, 죽은 전통만 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