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의 잘못된 선택 (창13)

■ 연구

롯의 잘못된 선택 (창13)

연구 0 168

우리 앞에는 항상 두 길이 있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할 길은 오직 한길입니다. 정답은 이미 정해져있습니다. 신앙으로 정직하게 바라보면, 정답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욕심에 눈이 멀면, 망할 길을 걸어갑니다.


창세기의 롯은 아브라함이 그 아비 집을 떠날 때 함께 길을 나섰습니다. 처음에 어떤 마음으로 따라나섰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삶의 여정을 보니, 아브라함과 함께 있으므로 복을 함께 받았습니다. 그 복이 너무 넘쳐서 이제는 두 사람의 가산이 함께 거하지 못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좌우로 나뉘어 각자의 삶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세상은 그런 방식이면 됩니다. 처음 출발은 삼촌 아브라함이 대장이었고, 조카 롯은 쫄병이었으나, 세월속에 롯도 자기 가산이 생기고, 자기 가정에 대장이되고, 이제는 독립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자기 실력대로 독립하면 됩니다. 세상은 이런방식인데, 신앙의 세계는 다릅니다. 택자는 택자가 살아갈 법칙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에 있었습니다. 그러면 롯은 모든 것을 다 포기하더라도 아브라함 곁에 있었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 받는 비결이고 풍성하게 되는 길입니다. 롯은 자기 부요가 자기 것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을 떠나서도 잘될 것이라 여겼고, 더 잘되기 위하여, 자기 눈에 좋아보이는 땅을 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거가가 소돔입니다. 하나님보시기에 악한 땅입니다. 하늘에서 유황불비가 내려 소멸시킬 정도의 땅이었다면, 하나님의 사람 롯이 보기에도 악한 것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환경으로는 좋은 땅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악하든지 나는 거룩하게 살면 되지 않겠는가? 롯의 생각은 이러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는, 소돔에 살면서 소돔 사람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잘 받습니다. 그래서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는 가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거룩한 말씀, 이 복된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세상과는 담을 쌓고, 좀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가까이하면, 세상을 받아들이면, 거기에 쉽게 물들어 버리는 것이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그런데 공회 안에서 태어나고, 공회 안에서 자라고, 공회 신앙밖에 모르는 분들 중에, 공회는 너무 답답하지 않냐라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빡빡하게 할 필요가 무엇인가? 다른 교회는, 다른 교계는 이 정도까지는 하던데, 다른 보수 교단도 저 정도는 하던데, 그래도 교회가 괜찮던데. 담이 너무 높은 것 아닌가? 담이 너무 두꺼운 것 아닌가? 담이 이렇게까지 있어야 하는가? 인간의 죄성을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물고기가 지유를 찾겠다고 물 밖을 나가면, 그건 자유가 아니라 자살행위입니다. 택자는 택자의 법칙 아래, 신앙의 법 아래 거하는 것이 자유이지, 그것을 벗어나는 것은 사망이 됩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악령은 우리를 이런 속임으로 속임니다. “하나님은 대장, 인간은 쫄병, 언제까지 그렇게 살아야하냐? 너도 너의 자유의사가 있고, 자유의지가 있고, 너의 판단이 있으니,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하나님같이 되어라.” 이것을 믿으면, 물밖으로 나가는 물고기가 됩니다. 거기에는 자유가 아니라 죽음이 있습니다.


택자에게는 택자의 법칙이 있습니다. 세상은 알수 없는, 세상은 이해살 수 없는 신앙의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법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지, 세상 법을 따라 판단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판단을 세상에 맡기지 않습니다. 그것을 ‘소송금지원칙’이라고 합니다. 단순히 착해서 소송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신앙의 법, 세상의 법보다 더 고귀한 법이 있는데, 상위법의 판단을 하위법인 세상에 맡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체계, 신앙의 법은, 세상을 초월합니다. 이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롯처럼, 중요한 때에 세상기준으로 판단을 해버릴 수 있습니다. 육신대로 판단하면, 반드시 죽게 됩니다. 이후의 롯의 비참한 결과는, 이미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으로 갈 때부터 정해진 것이었습니다. 롯의 실수를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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