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침례교 측의 무리한 주장, 그리고 사실은
최근 애매하게 떠도는 이야기 중에 성경침례교 측에서 주장했다는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다른 점도 있고 또 성경침례교의 일방적 주장만 전개하고 있어, 해당 내용 중 문제가 되는 부분을 '주장'으로 적고, 그 '답변'을 안내해 보려고 합니다.
1. 종교개혁의 시대
주장: 장로 교단은 이단적 칼빈주의를 신봉하고 있다. 성경침례교는 종교개혁의 정통 루터를 따른다.
답변:
루터가 “95개조 의견서”를 비텐베르그 성당 문에 게시한 날은 1517년 10월 31일이었습니다. 칼빈은 1509년 출생한 사람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할 때, 칼빈은 어른들의 교리 논쟁은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였습니다.
사실 루터가 처음 교황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것은 아닙니다. 루터 이전에 천주교 교리의 여러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한 사람들이 있었으나, 정치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교황청은 자신들의 교리에 반하는 사람들을 전부 화형으로 처리했습니다. 그래서 내적으로 반감은 있으나,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때 루터가 “95개조 의견서”를 게시한 것입니다. 루터는 처음부터 종교개혁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성당 문에 의견서를 게시하는 것은 신학자들 사이에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학적 의견에 대해서 게시하면, 그에 대해서 답글 형식의 게시가 이루어지고, 그것이 이어지면서 공개토론이 되는, 마치 오늘날의 인터넷 토론 같은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도 자기의 의견 95가지를 게시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글을 본 사람들, 특히 내적으로 반감은 있으나 겉으로 표현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루터의 의견을 혁명적으로 보았고, 널리 배포하기 시작했습니다. 루터의 의도와 다르게 “95개조 의견서”는 개혁주의의 출발이 되었습니다.
시대적으로 말하자면, 유럽은 1450년경 인쇄술이 발달하여 대량 인쇄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누가 어떤 주장을 한다할지라도, 교황청이 권력으로 덮어버리면 매장이 가능했습니다. 이제 루터의 시대에는, 비텐베르그 성당 문의 95개조 의견서 원본을 찢어버린다 하더라도, 이미 수많은 복사본이 널리 배포되어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출발된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루터, 쯔빙글리 등은 종교개혁 1세대입니다. 대표적으로 루터로부터 종교개혁이 출발하게 되었고, 그 영향을 받은 사람들, 그로 인하여 용기를 얻은 사람들이 유럽 전역에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대의적으로 “루터의 개혁파를 따른다”고 했습니다.
칼빈은 1533년에 개혁파로서의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그는 토마스 크랜머 등과 함께 종교개혁 2세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개신교 신앙을 1세대인 루터주의라고 하지 않고, 칼빈주의라고 흔히 말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종교개혁 1세대는 전부 루터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각 지역별로, 여러 이유로 종교개혁이 일어났는데, 그 불씨가 된 것, 그들에게 용기를 준 것이 루터의 사건이었을 뿐이지, 루터의 신학을 온전히 따른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를 루터주의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습니다.
또 루터의 사후에, 루터주의자들은 다시 천주교적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들의 교리, 교회, 사상, 체계가 루터의 가르침을 이어가지 못하고, 다시 천주교의 형식과 자세로 돌아가게 됩니다. 오늘날 개신교회와 루터교회는 하나라고 보기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개신교를 루터주의라고 말하지 않으며, 루터주의는 개신교와 구분되는 또 다른 형태로 남게 되었습니다.
2. 루터만 성경번역을 했다?
주장: 마틴 루터는 종교 개혁을 한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독일어로 루터 성경을 번역한 것이다. 왜냐하면 바른 성경이 있어야 바른 교리를 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나라의 장로교단 교회들이 보는 성경이 바로 로마 카톨릭 성서와 일치하는 책이고, 칼빈의 잘못된 교리를 합리화시켜주는 성경이다. 이런 성서를 보는 한 진정한 교회 개혁이란 말로만 끝나고 말 것이다. 장로교단 목사와 교인 여러분 여러분이 보는 성경은 신약에서만 2200단어 이상이 삭제된 틀린 성경이다. 그렇게 많은 단어가 없어진 성서로는 바른 교리를 알 수 없다. 성경은 모든 일을 시험하여 보고 선한 것을 붙잡으라고 명령하신다.
답변:
루터 이전에 종교개혁자들이 화형당했던 주된 이유 중의 하나는 성경의 번역이었습니다. 교황청은 성경의 언어를 거룩하다고 주장했고, 그 말씀에 일점일획도 가감하지 않기 위해서 번역을 금지했습니다. 성경을 자국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을 신성모독이라 여겼고, 그래서 성경은 오로지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로만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언어는 배우지 못한 일반 사람들은 알지 못했고, 이것을 이용하여 교황청은 십자군 전쟁, 면죄부 판매, 연옥 교리, 교황 무오설 등 온갖 미신과 거짓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루터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자국의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은 만인제사장의 시대라 모두가 직접 성경을 보고, 평신도라도 자기 신앙의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앞서 설명드린 것처럼, 루터의 시대에는 이미 인쇄술이 발달 되어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번역자와 번역본을 모두 불살라 버리면 덮어버릴 수 있었지만, 이제는 작정하고 인쇄되는 성경을 막을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개혁자들은 각자 자국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대중들에게 성경을 보급하는 일을 제일 과제로 삼고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루터가 독일어로 성경번역을 했던 이유는, 그가 독일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프랑스 사람이었던 칼빈은 프랑스어로 성경을 번역합니다. 이후 칼빈이 있던 제네바에는 공용어로서 영어 성경을 번역 출판하기도 하는데, 이 “제네바 성경”은 오늘날 개신교 성경 번역본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번역본입니다.
3. 기독교 강요란?
주장: 존 칼빈은 자기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고 말하지도 못했고, 기독교 강요를 통해서 잘못된 이단 교리를 교회 안에 주입시켜 잘못된 길로 인도한 사람이다.
그가 그렇게 된 것은 자신이 보던 로마 카톨릭 선서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답변:
1534년 10월 17~18일 밤, 프랑스 파리 시내 곳곳에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례와 교황주의를 비난하는 벽보가 배부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교황청은 10월 24일 수많은 개신교인을 신성모독으로 규정하고 학살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한 개신교인 탄압에 항의하며 쓴 책이 기독교강요입니다.
기독교강요의 내용은 십계명, 주기도문, 사도신경에 대한 개신교적 해설입니다. 전체 책 어디에도 칼빈 개인의 주장은 없으며, 수많은 교부들과 이전 신학자들을 통한 깨달음을 정리해놓은 백과사전과 같은 책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칼빈의 주장”이 아니라, “개신교 신앙의 종합”이라는 면에서, 이후 종교개혁자들의 근간으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이후 개신교 신앙은 칼빈주의라는 이름을 얻게 된것입니다.
“기독교강요”를 이단 서적으로 분류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내용이 되는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을 이단이라고 분류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해석이 되는 모든 교부들과 속사도들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이단이라고 분류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강요”는 기독교 역사적 가르침에 대한 종합서이지 개인의 주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 칼빈주의 5대 강령?
주장: 칼빈주의 5대 강령에 세뇌된 장로교회 목사들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택함 받은 사람은 어차피 하나님께서 믿고 구원받게 해 주실 것이라고 맹신하고 있지만 그 맹신의 끝은 영원한 불못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이런 장로교인들이 수백만 명이다. 칼빈주의 5대 강령은 구원의 복음이 아니라 지옥으로 보내는 급행 열차이다.
칼빈주의 5대 강령을 만든 존 칼빈이 과연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었겠는가?
답변:
칼빈의 사후 1603년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라는 사람이, 칼빈주의의 절대예정을 반대합니다. 그의 주장은 생전에 별로 주목받지 못했으나, 그의 사후에 그를 따르는 자들이 알미니안주의라 하여 체계적이고 확실한 주장을 펼쳐나갔습니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5가지 주장으로 절대예정을 반대했고, 그 사상을 널리 전파했습니다.
이 혼란에 대해서 당시 신학자들은 정확히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618년 네덜란드 돌트에서, 알미니안주의의 5가지 주장에 대해서 논의하기로 했습니다. 돌트회의에는 칼빈주의자와 알미니안주의자가 함께 모였고, 각자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며 여러 논쟁을 거쳤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619년 돌트 회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5가지 주장이 모두 틀렸음을 시사하는 5가지 문장으로 결론지어졌습니다. 그것을 “돌트신경”이라고 합니다.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은 이 “돌트신경”을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이라고 잘못 부릅니다. 마치 이것이 칼빈주의의 전부, 혹은 핵심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이 5가지는 알미니안주의의 오류를 반대한 것일 뿐이지, 칼빈주의의 요약이 아닙니다. 알미니안주의와 돌트회의는 전부 칼빈 사후에 일어났던 일이며, 이러한 교리 논쟁과 종교회의는 돌트회의 외에도 역사 속에 수없이 많이 있었습니다.
4. 장로교와 침례교
주장: 그는 여전히 로마 카톨릭의 종교 의식에 따라 유아 세례를 줬고, 물을 뿌리는 세례를 거부하고 성경대로 구원받고 침례에 순종하려는 침례교도들을 박해했다.
답변:
칼빈의 생애와 침례교의 출발은 시대적으로 전혀 맞지 않습니다. 침례교는 칼빈 사후에 나타났습니다.
침례교는 영국의 청교도에 근간이 있습니다. 청교도란, 영국의 개혁주의자들, 개신교도들을 뜻합니다. 영국의 천주교는 역사적으로 국왕과 결탁하면서, 성공회라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이 성공회 안에서 개신교로 전향한 사람들을 청교도라고 합니다.
청교도 중에는 기존의 성공회처럼, 교회가 국가와 결탁하여 사회 운동을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교회는 국가와 분리되어 신앙의 길로 가아한다고 주장하는 편이 있었습니다. 전자를 비분리파, 후자를 분리파라고 합니다. 이 분리파 청교도 중에 특별히 침례를 주장한 사람들이 침례교의 출발이 되었습니다.
청교도는 개혁교회 칼빈주의입니다. 다시 말해서, 장로교든 침례교든, 오늘날 모든 개신교회의 뿌리는 칼빈주의에 있습니다. 루터주의가 계승하지 못한 루터의 종교개혁 의지를 칼빈이 이어받았고, 칼빈이 특별한 사건으로 인해 기술한 “기독교강요”라는 서적이 개신교회의 신앙을 대변하는 변증이 되면서, 이후 모든 개혁교회는 칼빈주의를 표방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침례교가 칼빈주의를 거부한다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거부한다는 뜻이 됩니다.
침례교가 장로교를 비판하려 한다면, 종교개혁 출발은 같았으나, 청교도의 분리파 비분리파 논쟁에서부터 달라졌다고 비난해야 말이 됩니다. 장로교도 침례교도 모두 칼빈주의입니다. 칼빈주의가 아닌 것은 알미니안주의거나, 천주교가 되어야 합니다.
5. 칼빈과 제네바
주장: 칼빈은 제네바에서 교황 흉내를 내며 구약적인 신정정치를 시도하려고 했다. 이것은 칼빈 자신이 싸우며 로마 카톨릭에서 개혁했던 것을 무색하게 하는 일이다. 칼빈이 제네바에 세우려고 했던 정치는 이름만 개혁한 것이지, 그 내용은 종교와 국가를 일치시키려는 국가 교회로서 로마 카톨릭의 정치와 똑같은 것이다.
도덕적 영역에서도 시민들을 감시했는데, 간음, 매춘, 간통, 동성애를 엄하게 처벌하고, 춤, 외설적, 노래, 마술, 주먹다짐, 술주정 등 부도덕한 죄들을 아주 엄하게 처벌했다. 칼빈을 높이는 신학자들은 칼빈의 대단한 학식과 지식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칼빈은 자기 주변에서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부족한 사람이나 제도들을 자신이 직접 바로잡으려고 폭력을 사용하는 율법주의자였다. 그로 인해 율법적인 교육법이 제네바 시에 사회법이 되었고, 약간의 불경건한 행위도 사회적인 범죄로 처리되어 처벌 대상이 되었다. 공중 예배에 참석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설교를 듣다가 웃었다고 해서 세 사람이 3일 동안 감옥에 갇힌 적도 있었다.
칼빈은 자기를 유선자라고 부른 사람을 고문해서 사형에 처했다.
세례 받는 것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80세 노파와 여섯 아이의 어머니를 처형했다.
한 출판업자가 칼빈을 비난했다고 해서 불에 달은 쇠꼬챙이로 그의 혀를 잘랐다.
자신의 신학 이론인 기독교 강요에 반대하는 사람을 국사범으로 취급했고, 2명의 뱃사람이 싸웠다고 해서 그들을 모두 사형시켰다.
고문 방법으로는 엄지 손가락을 조이고 발바닥을 불로 지지고, 밧줄로 다리를 붓고 잡아당기는 참혹한 방법을 사용했으며, 칼로 찢고 해충들로 뜯어먹게 했다.
그처럼 사악한 죄를 지은 칼빈이 과연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었겠는가?
로마 카톨릭이 소위 종교 재판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행했던 사악한 행태와 똑같다.
존 칼빈이 제네바시를 5년간 통치하면서 추방한 사람이 76명이며, 공식 처형한 사람은 58명인데, 그중에서 하영당한 사람이 35명이었고, 교수대에 매달린 사람은 13명이다.
답변:
칼빈은 프랑스인입니다. 그가 1533년 개혁주의적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프랑스로부터 추방당했고, 신앙의 망명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미 유럽은 루터 이후로 종교개혁의 흐름이 있던 시기입니다. 아직까지 성경번역은 부족했고, 신학적 이해도 모자랐으며, 교황청은 국가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종교개혁은 정치세력과도 많은 연관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학자들은 신앙의 이유로 개신교 신앙을 주장했고, 지역의 영주들은 중앙집권의 권력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하여 “신앙의 자유”라는 명분을 사용했습니다. 스위스의 제네바도 그와 같은 도시였습니다. 교황청의 독재로부터 독립하기 위하여 제네바 의회는 1537년 공식적으로 개신교 신앙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목회자로 개혁주의자 기욤 파렐을 초청합니다. 파렐은 당시 망명자였던 칼빈을 제네바로 초청하여 목회에 함께합니다. 이것이 칼빈의 첫 제네바행입니다.
그러나 제네바 의회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했을 뿐, 신앙심이 투철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파렐과 칼빈을 명분으로만 세워놓으려고 했지, 그들을 신앙의 지도자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파렐과 칼빈은 목회자로서 제네바에 신앙적 요구를 했고, 결국 제네바 의회는 귀찮은 두 사람을 1년 만에 추방시켜 버립니다.
이후 칼빈은 스트라부르라는 도시에 초청을 받아 거기에 거합니다. 스트라부르 의회는 칼빈에게 우호적이였고, 그에게 바로 시민권까지 내어줍니다. 그렇게 칼빈은 계속 스트라부르에 거하는 줄 알았으나, 1541년 제네바에서 그를 다시 초청을 하게 됩니다.
제네바 의회는 눈엣가시 같은 칼빈을 쫓아냈으니 좋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이후 교회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고, 개혁 신앙의 정체성을 유지하기도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칼빈을 다시 초청하기로 결의하였고, 이후 1556년까지 칼빈은 제네바에서 목회자로 생활하게 됩니다. 그러나 제내바 의회는 여전히 칼빈에 대해서 우호적인 사람보다, 싫어하는 세력이 더 많았으며, 몇 번이나 다시 칼빈을 추방하려고 시도했는데, 결과적으로 잘되지는 않았습니다. 칼빈은 1556년 이후로 건강이 악화되어 목회를 제대로 하기 어려웠고, 이후 저술 활동에 더욱 전념합니다. 그리고 1564년에 사망합니다.
칼빈은 프랑스인입니다. 제네바는 스위스의 도시입니다. 제네바에서 칼빈은 외국인이었으며, 그에게는 어떠한 의회적 권한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제네바 의회는 칼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며, 그의 말을 듣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칼빈의 목회 생활은 고단한 일의 연속이었습니다. 칼빈이 잠깐 거했던 스트르라부르는 칼빈이 오자마자 시민권을 주고 그를 환영했으나, 제네바는 칼빈이 제네바에 거한 지 거의 20년이 될 때까지도 시민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가 건강이 악화되고 더이상 목회를 하기 어렵게 되었을 무렵, 1559년에 비로소 시민권을 허락합니다.
역사를 모르는 사람은 칼빈이 제네바에서 교황적 권위를 가졌다거나, 자기에게 반대한 사람을 죽였다거나, 이런 말을 합니다. 이런 주장은 당시 칼빈을 음해하기 위한 거짓 선동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거짓 뉴스입니다. 실제로 칼빈은 평생을 제네바의 외국인으로 살았으며, 그는 교회의 목회 외에 다른 의회적 권한, 재판에 참여하는 권한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의회는 칼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칼빈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칼빈이 제네바에 거주하는 동안 제네바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처형을 당한 사람은 세르베투스 한 사람뿐이었는데, 세르베투스의 처형은 제네바 의회의 결정이었고, 칼빈은 그 처형 결정에 끝까지 반대했었습니다.
6. 칼빈과 세르베투스
주장: 존 칼빈이 1541년부터 1546년까지 5년간 인구가 1만 3천 명인 제네바 시에서 통치하며 교황 노릇을 하고 있을 때 그는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것도 그냥 죽인 것이 아니라 교황처럼 사악하고 끔찍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였다. 칼빈은 그의 예정서를 비난했다고 해서 세디베투스를 화형에 처했다. 세르베투스는 자기를 죽인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했다.
답변:
1531년 미카엘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삼위일체의 오류”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개혁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로마 가톨릭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신성모독이었습니다. 당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던, 가톨릭은 세르베투스를 바로 잡아들였고, 지금까지 이단자들을 처형하던 것과 같이, 그를 화형에 처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르베투스는 극적으로 탈출했고, 이후 20년을 숨어지냅니다.
세르베투스는 숨어지내는 동안에도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고, 가명으로 저술 활동을 하며 삼위일체와 성자의 신성을 부인했습니다. 교황청은 그를 잡아 죽이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어느 도시에서든지 세르베투스가 나타난다면 즉각 처형을 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1553년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세르베투스는 제네바의 재판에 서게 됩니다. 당시 제네바는 교황청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고, 독립적인 의회를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또 제네바에는 칼빈이 있었지만, 제네바 의회가 칼빈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흔히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니 세르베투스는 제네바에서 재판을 받는다면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네바 의회도, 전 세계의 적이 된 세르베투스를 우호 해 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를 어떻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외국인인 세르베투스에 대해서 제네바 의회가 할 수 있는 최고 형벌은 그를 추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20년 만에 잡아들인 세르베투스를 놓아준다는 것은 당시 유럽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교황청과 사이가 좋지 않은 제네바 의회가 그를 교황청에 넘길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제네바 의회는 세르베투스에 대한 처분에 대해, 당시 개신교 진영에 있던 네 개 도시 취리히, 베른, 바젤, 샤프하우젠에 자문을 구합니다. 네 개 도시는 세르베투스에게 최고 형벌을 내릴 것을 요구했고, 특히 베른은 자기 도시였다면 세르베투스가 화형에 처해졌을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이 자문에 따라 제네바 의회에서는 세르베투스에게 화형을 선고합니다.
화형 집행에 앞서 칼빈은 세르베투스를 만나서 그를 설득해보려고 했으나, 세르베투스는 칼빈의 면회를 거절했습니다. 또 칼빈은 제네바 의회에 세르베투스의 화형에 대해 지나친 결정이라고 탄원했으나, 의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후에 칼빈은 적어도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참수형으로 바꿔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했으나, 이 역시 제네바 의회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1553년 10월 27일, 세르베투스는 제네바 가장자리에 있는 샴펠 언덕에서 화형을 당했습니다. 세르베투스는 칼빈 생전에 제네바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사형을 당한 유일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7. 킹제임스버전(KJV)과 흠정역(欽定易)
주장: 칼빈주의가 아니라 성경이 뭐라고 말씀하는지를 찾아보시라. 개혁 성경 개혁 개정판은 이제 그만 보시고 바른 성경을 찾아 공부하시라. 한글로 된 바른 성경은 오직 한글 킹제임스 성경뿐이다. 흠정역은 가짜 유사품이다.
답변:
킹 제임스 성경은 윌리엄 틴들이 성경을 번역하다 화형을 당한 이후, 영국의 제임스 1세 국왕이 그의 유업을 이어받아 자신이 임명한 학자들에게 지시해, 번역하고 출판된 성경입니다. 흠정역이란, “왕의 명에 의해서 번역된”이라는 뜻입니다. “킹제임스”라는 것은 영어식 표현이고, “흠정역”이란 한자식 표현입니다. 이 둘은 같은 번역본을 뜻하는 말입니다.
한국 개신교의 첫 성경은 1911년 “구역성경”입니다. 대한성서공회에서 히브리어 구약성경과 헬라어 신약성경을 참조하고, 당시 중국어 성경과 영어 성경을 번역 문헌으로 삼아 번역하였습니다. 이후 현대어로 개정하는 과정을 거쳐 오늘날 개역 성경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 한글 성경은 처음부터 히브리어, 헬라어 원어 성경을 참조로 했으며, 흠정역이나 다른 번역을 무조건적으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글 번역은 세계적으로도 “원문에 가깝게 잘된 번역”으로 인정받는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