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의 신앙고백(딤후3:14-15)

■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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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우리의 신앙고백(딤후3:14-15)

날짜 1970/01/01/09:00(목)
분류 연구
발제
연구 0 34

역사 속에는 수많은 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 신학교에서는 이름이나 듣고 말고, 일반 교인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신앙고백들과 교리들이 있습니다. 왜 그런 것들이 필요했을까? 당시 수많은 교리 논쟁과, 이단의 미혹에서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그런 것들이 필요했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도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오늘날 잘 믿어 보려는 사람들, 속화 된 교회가 다시 옛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신앙고백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 문답은 한국의 여러 교단들에서 공식적으로 표준으로 삼을 만큼 중요하게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신앙고백이, 그 요리문답이 왜 생겨났는가를 알지 못하면, 교리나 달달 외우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늘날 개혁주의를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정도 수준입니다.


시대의 교리는 시간을 초월하는 진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진리란, 불변의 것입니다. 그러니 진리는 시간을 초월하는 초월성이 있습니다. 모든 시간과 역사를 초월하여 적용되는 것이 진리의 체계입니다. 그런데 교리라는 것은 당시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면 수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교리는 항상 역사와 함께 생각을 해야하지, 교리만 놓고 보면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는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기독교는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는 말을 악용해서, 도덕성을 버렸습니다. 아무리 악하게 살아도,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시니, 마음껏 죄 짓고 믿는다는 말만하고 맙니다. 그러니 이제는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가 틀렸다고 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습니다. 루터보고 이단이랍니다. 악용하는 사람도 문제고, 그걸 보고 루터 틀렸다고 하는 사람도 문제입니다.


이신칭의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함께 알아야합니다. 그래야 오해가 없고, 오늘 우리에도 바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럽은 모든 사람이 기독교인이던 시절입니다. 태어나면 교회에 가서 출생신고를 하던 시절입니다. 그리고 일반 사람은 성경은 읽을 수가 없어서, 육신대로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가지 않을까라는 모호한 생각 속에 살던 시절입니다. 그런 때에, 교회에서 면죄부를 사면 천국을 간다고 했습니다. 고해성사를 하면 천국을 간다고 합니다. 자기를 쳐서 고난을 받으면, 며칠 금식을 하고 기도를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루터의 이신칭의는 이 모든 행위를 반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택과 예정이다. 우리의 행위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


이렇게 역사적 배경과 교리를 함께 이해하지 않으면, 수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킵니다. 그래서 참 많은 사람들이 튤립교리를 칼빈 교리의 핵심이라는 무식한 소리를 합니다. 역사를 알아야 그 다섯 가지가 알미니안의 다섯가지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개신교 기독교인이라면, 칼빈의 기독교강요라는 책은 이름도 들어봤고 탁월한 책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기독교강요를 읽어본 사람은 많이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전권을 다 읽기에 분량도 많고 내용도 다소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 기독교 강요는 일반사람들에게 개신교 신앙을 소개하는 책이었습니다. 어려운 책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의 해설입니다. 탁월한 신학자 칼빈의 자기 주장이나 소설책이 아닙니다.


천주교 천년의 암흑에서 빠져나올 방안은 새로운 신앙고백이 아니었습니다.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이면 충분했습니다. 그 후에 시대에 따라, 역사에 따라, 지역에 따라 각기 다양한 신앙고백이 있었지만, 이 세 가지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신앙고백의 절정이라 하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도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 해설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사람은 더 많은 지식을 알고 싶어 합니다. 많이 알면 똑똑한 줄 압니다. 다 외우면 대단한 줄 압니다. 그러나 신앙의 역사는 항상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교리 공부, 신앙고백 연구 하는 분들 중에 이 원리를 말하는 사람을 한명도 본적이 없습니다. 그저 더 많이 알면 대단한 줄 압니다. 학자가 되어서 그렇습니다. 신앙을 학문으로 봐서 그렇습니다. 학자는 복잡하고 어려운 것을 알면 대단한 사람이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 지켜보겠다고, 율법을 얼마나 복잡하게 만들었던지, 안식일에 걷는 걸음 수까지도 세어놓았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이름으로,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긴다고 정죄를 합니다. 안식일의 주인도 알아보지 못하고...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고백은 무엇일까?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이 세 가지를 오늘 우리에게 주신 현실에 맞도록 적용하는 신앙의 실력은 있어야겠습니다. 다른 복잡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아는 것으로 충분하고, 그것을 바로 아는데 힘쓰는 것이 오늘 우리의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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