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것 (딤후3:14-15)

■ 연구

연구실로 아끼고 조심해 주셨으면,
모든 분에게 깨끗한 모습을 보이고, 신앙에 유​익하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 

[]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것 (딤후3:14-15)

날짜 1970/01/01/09:00(목)
분류 연구
발제
연구 0 51

신앙고백이란, “나의 신앙은 이것입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공적인 문서가 되면, 나 한 사람의 신앙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이 됩니다. 우리 교회가, 우리 공회가, 우리 노선이, 우리 교단이, 우리 개신교가 믿는 신앙이란, 이런 것입니다라는 대표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을 신앙고백이라고 합니다. 사도신경은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모든 교단, 교회에서 인정되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도신경의 고백을 우리의 공통된 믿음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 이후에, 역사 속에 다양한 신앙고백이 있었던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그 당시, 그 사회에서 “우리의 믿음은 이것입니다.”라는 정의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에 의해서, 이단과의 논쟁 때문에, 교리적인 오해 때문에도, 자기 신앙 정체성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고, 그런 것들이 공적으로 함께 받아들여진 것이 신앙고백입니다.


우리는 교리를 대할 때, 교리에 대한 이해는 역사에 대한 이해와 함께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역사 없이 교리를 단어만 놓고 대하면, 수많은 오해에 빠질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천주교와 논쟁했던 교리는 이신칭의 교리입니다. 이신득의라고도 합니다. 천주교는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 행위구원의 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행위구원이란, 우리 공회가 말하는 건설구원의 영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본구원을 행위로 얻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루터가, 기본구원은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교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절대 예정, 절대 주권으로 이루어지며, 우리가 하는 일이란, 오직 믿는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다.” 이신득의라고 합니다.


이신득의 교리는 시대적 상황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몇몇 사람들은 시대적 상황을 떼어놓고, 이신득의만을 가지고 논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믿는 것만으로 의를 얻는다면, 믿기만 하고 행위는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이 사람들은 이신득의가 틀렸다고 말을 합니다.


교리를 이해할 때는, 그 시대를 함께 이해해야 바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시대적 이해 없이 단어만 가지고 꼬투리를 잡으면, 어느 교리든지 오류로 만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


역사 속의 수많은 신앙고백들은 교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 당시 그 시대 필요했던, 강조되어야 했던 교리들입니다. 그러니 그 글자만을 놓고 보면, 오해하기 쉽고, 오류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당시 역사와 함께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모든 신앙고백을 다 외우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시대를 지나 오늘의 신앙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 지식, 신앙 교리는 선조들의 신앙고백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굳이 그러한 것들을 글자로 외우지 않는 것입니다.


공회가 사도신경을 굳이 예배 시간에 외우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 우리의 교리 속에 사도신경의 고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외워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성경을 모르던 시절, 성경이 번역되지 않았고, 번역된 성경이라도 너무 비싸서 가지지 못했던 시절, 모든 교인들에게 신앙이란 이런 것입니다라고 가르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도신경은 사도들의 신앙을 가장 잘 요약한 신앙고백입니다. 신자가 최소한 이 정도는 알아야 한다라면, 사도신경의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을 흔히 볼 수 있는 시대입니다. 요약정리된 사도신경이 아니라, 원전인 성경을 직접 읽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는 사도신경의 원전이 되는 성경 연구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의 전체는 성경이고, 사도신경은 요약입니다.


역사 속의 신앙 고백들은 모두가 성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경을 믿는 믿음을 요약한 것들입니다. 그 시대별로 강조되어야 할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신앙고백을 생각해볼 때, 우리는 원전인 성경으로 들어가야 하지, 역사 속의 신앙고백 신학 공부하고 있을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생명 있는 것이지 죽은 전통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있습니다. 주기도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것만 기도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주기도문을 통해서 우리의 기도를 배워, 우리 자신의 기도, 우리 자신의 고백으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이것이 생명력입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자기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기도문만 외웁니다. 죽은 전통이라서 그렇습니다. 우리 개신교는 처음부터, 그런 것을 깨고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진들은 예배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가능하면 질서를 위하여 기본적인 격을 갖추기는 하였지만, 필요하면 사과 박스 위에 올라서서 설교하기도 했었습니다. 형식이 많아지고, 그것에 얽매이면 천주교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 공회는 사도신경이라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사도신경을 우리의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신경의 고백은 우리가 당연히 받아들이는 믿음이고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래서 기본으로 알아야 하고, 당연히 아는 것이나, 그것을 예배 시간에 반복하는 형식에는 얽매이지 않을 뿐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사도신경을 대하는 우리 공회의 태도, 이 자세를 생각해보자는 말입니다. 공회 역사를 아시는 분들, 공회에서 오래 신앙생활 하신 분들이 쉽게 하는 말씀 중 하나가 “이게 공회 신앙입니다.”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공회 신앙입니까? 공회의 형식입니까? 공회의 교리입니까? 공회의 전통입니까?


신앙과 교리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형식과 전통은, 더 좋은 것이 없으면 유지하지만, 더 좋은 것이 있으면 과감히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공회 찬송가는 타 교단의 찬송가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특별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타 교단의 찬송가가 너무 자주, 무분별하게 바뀌다 보니, 언젠가 단일한 완전한 찬송가가 나오기를 소망하며 1987년에 임시로 찬송가를 만든 것입니다. 이건 진리가 아닙니다. 더 좋은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거의 40년이 되었는데, 그래도 진리는 아닙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무엇을 배웠습니까? 우리가 배운 진리, 우리가 배운 교리, 그 믿음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과 행정은 구분해야 합니다. 신앙은 시대가 달라져도 지켜야 합니다. 행정은 더 좋은 것이 있으면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교회 내에 불필요한 분쟁이 일어납니다. 그 분쟁은 하나님 중심도 아닙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식은 성경입니다. 하나님 말씀입니다. 우리가 배우고 확신한 일은, 사람의 지식 사람의 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도구입니다.


우리 공회는 평소 성경을 많이 읽으라고 권장을 합니다. 천주교 암흑시대에는, 교인들에게 성경이 없었습니다. 번역된 성경도 없었고, 성경을 가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강단의 설교를 분별할 수 없었고, 양심 없는 성직자들이 인본의 이야기를 해도, 그것이 신앙인 줄 알고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성경 번역부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출판하고 보급해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게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자기 신앙으로 자라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각자 자기 신앙으로 자라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성경을 잘 연구할 수 있는 도구가 많습니다. 이미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밝혀놓은 체계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 공회에는 백목사님을 통해서 밝혀진 은혜가 많고, 지금도 정리되고 전해지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런 것들을 잘 활용해서, 성경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에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거할, 배우고 확신한 일은, 인간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경으로 들어가는 가르침, 성경 중심의 가르침,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도록 하는 가르침입니다. 형식은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로 들어가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니 더 좋은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에 거하고, 진리에 확신하고, 형식에는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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