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의 친구 되는 것 (요15:14)
날짜 | 1970/01/01/09:00(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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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
발제 |
하나님과 동행을 말하면, 우리를 하나님과 동급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 우리는 그릇입니다.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는 그 뜻대로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위치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하나님 독재이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절대주권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행하시는 일에, 우리는 모든 순종으로 대해야 합니다.
성경에 주님을 우리의 “친구”라고 하니, 한국 사람들은 이 친구라는 단어에 대한 이해 때문에 오해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친구”는 동급생, 동급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친구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친구의 반대말은 원수입니다. 하나님과 불화, 원수입니다. 하나님과 화평, 친구입니다. 주님과 친구가 되었다는 것은, 주님과 화평 되었다, 주님과 같은 편이 되었다, 주님과 연합되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고, 주님의 뜻이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뜻이 되고, 주님의 의지가 우리의 충성이 되는 것, 그것이 주님의 친구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친구 된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주님의 친구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4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조건입니다. 순종을 말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말씀에 “곧 나의 친구라” 주님과 친구 되는 것, 주님과 화평하는 것, 주님과 연합되는 일에는 우리의 순종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의견을 터놓고, 합의를 보면서 동업을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말씀을 모시고, 오직 말씀만 모시고, 자기 생각, 자기 관점, 자기 판단은 모두 내려놓고, 오로지 말씀에 순종함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친구와 여행을 가면, 서로 의견이 다르고, 생활 습관이 달라서 많이 싸우게 된다고 합니다. 그럴 때, 불화를 막기 위해서는 나는 이만큼, 너는 요만큼 서로 양보하고 맞춰가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동행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만큼 양보했으니, 하나님도 저에게 요만큼은 양보하십시오.” 이런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께 다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에, 하나님의 기준에,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다 맞추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그래서 순종입니다.
순종에는 “내가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따지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로지 순종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을 똑똑한 신학자 정도로만 아는 사람이 많은데, 그의 인생을 보면 참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이 가라 하시면 가고, 주님이 서라 하시면 서겠습니다.” 칼빈의 인생의 고백입니다. 주님이 내어놓으라 하시면, 나의 심장도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칼빈의 신앙 자세였습니다.
오늘 우리 개신교 기독교를 칼빈주의라고 합니다. 칼빈의 신앙을 이어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말 칼빈의 신앙을 이어받았는지, 칼빈의 신학만 따라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순종의 사람, 충성의 사람 칼빈이었는데, 오늘 신자들에게는 진실한 순종과 온전한 충성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본으로 왜곡하고, 성경에 다른 사상을 덧붙이기를 예사로 하는 시대입니다.
남을 비판하기보다, 지금 나는 어떤가? 신앙이라는 명패와 인본이라는 명패가 같이 붙어있지는 않은가? 어떻게 그 두 가지가 같이 붙어있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 편에 붙었으면, 하나님과 친구가 되었으면, 세상은 원수입니다. 내 안에 인본은 원수입니다. 그것과는 동행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