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삭의 우물들(창26:19-22)
날짜 | 1970/01/01/09:00(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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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연구 |
발제 |
본문은 이삭이 여러 우물을 파는 사건을 기록합니다. 먼저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다시 팠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블레셋 사람들이 그 우물을 메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물을 팠더니 목자들이 싸움을 합니다. 그래서 싸움을 피해서 우물을 다시 팠습니다. 그런데 또 싸웁니다. 이것을 몇 번 반복을 하다가 르호봇이라는 곳에 이르러서야 싸움을 그칩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블레셋은 멀쩡한 우물을 막아버렸고, 새로 판 우물들에서는 목자들이 계속 싸움이 일어나고, 참 이삭으로서는 억울하고 불편한 환경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로 이런 것을 텃세라고 하는데, 이방인으로서 나그네로서 받아야했던 텃세는 참 힘든 일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삭의 고백을 보면, 일반적인 생각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현실인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던 이삭의 복된 마음을 봅니다. 또한 동시에 우리 공회가 현실을 대하는 믿음의 자세를 이삭을 통해서 한 번 더 보게 됩니다.
저작권 시비와 수많은 고소, 고발 건으로 우리 공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남들이 볼 때에는 억울하고 힘든 일입니다. “설교”에 저작권을 걸고, 세상법으로 교회를 괴롭히는 것은, 어느 교단, 어느 교회가 보아도 웃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공회 핵심이라는 사람들이, 자기 이익에 눈이 멀어서 그런 짓을 했고, 우리 부공3은 많은 피해를 받았습니다. 객관적인 사실만 놓고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 공회의 해석은 “지난 세월 재독만 했고, 이제는 우리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자라가라는 하나님의 뜻이다.”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과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감사하는 것이, 말로는 쉽고 이론으로는 말하지만, 실제로 그러기가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그들의 저작권 주장 덕분에, 우리는 재독에서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고소, 고발 덕분에, 법을 모르던 우리가 많은 부분을 합법적인 틀 안에서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이 되어지는 것 자체가 우리 공회의 믿음이고 저력이고 신앙 실력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은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할 만한 말들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좋게 보려는 것”과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바라보는 것은 차원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어찌되었든 인본이고 자기중심이 됩니다. 후자는 하나님 중심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결국 우리의 신앙 건설까지 이어집니다.
이런 공회의 시각, 관점이 처음 저에게는 많은 충격이었습니다. 공회적으로 대표적으로 예를 든 것 외에도, 개별적인 삶에서도 신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결국, 어떤 일이든 그 사람에게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일”이 되었습니다. 참 복이 있는 사람은 이런 것이구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