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선 자의 무게 (고전11:1)
날짜 | 1970/01/01/09:00(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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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연구 |
발제 |
바울은 신약시대의 사도로서, "나를 본받으라"는 말을 몇번 합니다. 그의 심정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런말을 했을까 싶습니다.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본받아 자라가야할 자들이,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를 스스로 찾아 가야할 자들이, 도무지 주님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으니, 눈에 보이는 나라도 보고 따라오라는, 안타까운 심정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또 이 말을 하는 바울 자신에게는 얼마나 무거운 말이었을까? "그리스도를 본받는 나를 본받으라" 이렇게 말해놓고, 자신은 그 말, 그 위치를 책임지기 위하여서라도 얼마나 무거운 책임감이 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한국의 사관생도들의 구호가 "나를 따르라"입니다. 지도자가 앞서고, 휘하의 병사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오늘날 지도자들 중에 정말 이런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정치지도자들 중에 우리가 인격적으로라도 본받을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나라를 대표한다는 그들이, 나라의 무엇을 대표하는지.
세상 정치뿐만 아닙니다. 오늘날 종교지도자들은, 우리 기독교 지도자들은, 세상의 도덕기준으로도 부끄러운 수많은 일들로 언론에 언급되었습니다.
80년대 이전에만 해도, 안 믿는 사람들도 "목사선생님"이라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한국어의 극존칭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목사"뒤에 욕이 붙습니다. 참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앞선 자들이 그 무게에 합당하지 못할때, 세상의 지탄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공회, 우리 목회자의 무게를 생각해봅니다. 앞선자로서 가장 무거운 길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교인들에게 "이게 옳은 겁니다." 정도는 말할 수 있는 삶을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쳐봅니다. 그래야 양심있는 목회자입니다.
지금, 우리 가장 앞에 서신분은 적어도 참 양심은 있는 분입니다. 나는 어떤가. 나는 우리 교회 목회자로서,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가 돌아봅니다.
윗물이 더러우면 아랫물이 맑을 수 없다고 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탄식이었습니다. 그 당시 한국이 그랬고, 오늘날 한국이 그렇습니다. 당시 교계가 그랬고, 오늘날 기독교가 그렇습니다.
자녀는 부모를 보고 자란다면, 교인은 목회자를 보고 자랄텐데, 앞선자에게 주어진 무게가 큽니다.
선배의 좋은 모습을 보며, 나는 나의 후배에게, 나는 나의 양들에게 "본 받을 만한" 모습을 가지려고 발버둥치는 양심은 있는가, 돌아봅니다.